빛과 침묵의 화가 — 요하네스 베르메르
델프트의 한 사람이 삼백 년 전 그려둔 정적을, 우리는 아직도 다 읽지 못했다
이어지는 이야기 3편읽는 시간 약 8분

베르메르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놀랄 만큼 적다. 그가 남긴 그림은 오늘날 서른네 점 안팎으로 헤아려지고, 생애의 기록은 몇 장의 문서로 흩어져 있을 뿐이다. 그는 델프트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죽었고, 많은 자식을 두었고, 빚을 남겼다. 그게 거의 전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그 적은 그림들 앞에 서면 누구든 조용해진다. 창으로 스며든 오전의 빛, 우유가 그릇으로 떨어지는 그 가느다란 흐름, 어깨 너머로 우리를 돌아보는 한 소녀의 젖은 입술. 베르메르는 소리가 없는 화가다. 그의 방에서는 시간이 아주 천천히, 거의 멈춘 듯이 흐른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우리가 그토록 오래 그의 그림 앞에 머무는 것은, 그가 그린 것이 사물이 아니라 사물 위에 내려앉은 빛, 그리고 그 빛이 만들어내는 침묵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돌아보는 얼굴, 이름 없는 소녀
이 그림은 초상화가 아니다. 스마트히스토리의 미술사학자 베스 해리스(Beth Harris)와 스티븐 저커(Steven Zucker)는 이 작품을 트로니(tronie)라고 설명한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 트로니란 특정 인물이 아니라 하나의 유형이나 성격, 표정을 그린 '얼굴 그림'을 뜻했다. 그러니까 이 소녀에게는 원래 이름이 없다. 그녀가 누구인지 우리는 모르고, 어쩌면 베르메르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이국적인 옷을 입고, 동방풍의 터번을 두르고, 귀에는 있을 법하지 않게 커다란 진주를 달고 있는 이 얼굴은, 실재한 누군가라기보다 빛을 담기 위해 만들어진 하나의 그릇에 가깝다.
마우리츠하위스는 이 그림을 1665년 무렵의 것으로 본다. 캔버스에 유채, 44.5 × 39센티미터. 미술관이 자랑하는 가장 유명한 소장품이자, 세상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그림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명성이라는 것은 종종 그림을 가린다. 우리는 이 얼굴을 너무 많이 보아서, 정작 제대로 본 적이 없는지도 모른다.
가까이서 보면 베르메르가 빛의 화가임을 부인할 수 없게 된다. 소녀 얼굴의 부드러움, 촉촉한 입술 위에서 반짝이는 작은 빛의 알갱이, 그리고 물론 그 진주. 마우리츠하위스의 최근 연구는 흥미로운 사실을 밝혀냈다. 베르메르가 그리는 도중 구도를 바꾸었다는 것이다. 귀의 위치, 머릿수건의 윗부분, 목덜미의 선이 지금과 달랐다. 그는 완성된 이미지를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리면서 찾아나갔다.
또 하나. 머릿수건과 저고리의 그 깊은 파랑은 우연이 아니다. 마우리츠하위스에 따르면 그것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준보석 청금석(라피스 라줄리)으로 만든 울트라마린이다. 17세기에 이 안료는 금보다 귀했다. 이름 없는 소녀의 머리를, 베르메르는 금보다 값진 파랑으로 감쌌다.
그리고 그녀는 돌아본다. 마치 방금 이름을 불린 사람처럼, 입술을 살짝 벌린 채. 우리는 그 부름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그녀의 대답도 듣지 못한다. 오직 그 사이의 침묵만이 삼백 년째 그대로 걸려 있다.
이름 없는 얼굴을, 그는 금보다 값진 파랑으로 감쌌다.
떨어지는 우유, 멈춘 세계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은 이 그림을 1660년 무렵의 것으로 본다. 미술관의 해설은 단순하고 정확하다. 한 하녀가 우유를 따른다. 자기 일에 완전히 몰두한 채로.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우유의 흐름을 빼면, 나머지는 모두 멈춰 있다."
나는 이 문장을 오래 생각했다. 그림 속에서 움직이는 것은 오직 그릇으로 떨어지는 그 가느다란 우유 줄기뿐이다. 여인은 조각상처럼, 밝은 빛으로 가득한 방 안에 서 있다. 미술관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그녀는 "조각상처럼" 서 있다. 베르메르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동작 하나를 가져와, 그것을 압도적인 회화의 주제로 만들었다. 빵과 우유와 창으로 들어오는 아침의 빛. 그게 전부인데, 그게 전부여서 오히려 성스럽다.
국립미술관은 베르메르가 빛을 다루는 방식에도 주목한다. 그는 수백 개의 색점으로, 빛이 사물의 표면 위에서 어떻게 노니는지를 포착했다. 빵 껍질의 오돌토돌한 질감, 바구니의 테두리, 벽의 못자국. 가까이 다가서면 그것들은 물감의 작은 점들로 흩어지고, 물러서면 다시 아침 햇살로 모여든다.
2022년, 국립미술관은 첨단 촬영 기술로 이 그림의 표면 아래를 들여다보았고,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여인의 머리 뒤 벽에는 원래 나무 주전자걸이와 걸려 있는 도자기 주전자들이 그려져 있었다. 오른쪽 아래에는 버들가지로 엮은 화로 바구니가 있었다. 아기를 따뜻하게 하고 기저귀를 말리던 그 바구니를, 베르메르는 지워버렸다. 마우리츠하위스와 함께 작업한 연구자들은 이 밑그림에서 화가의 선택을 읽었다.
덜어내는 것이 곧 채우는 것이라는 원리. 국립미술관은 이것을 "적은 것이 많은 것(less is more)"이라 표현하며 베르메르 예술의 일종의 좌우명이라 불렀다. 산만한 세부가 아니라 본질에 대한 집중으로 강렬한 이미지를 만드는 것. 그가 벽에서 주전자들을 지웠을 때,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이 아니라 빛과 침묵이 들어찼다.
우유의 흐름을 빼면, 나머지는 모두 멈춰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 이라고 그는 썼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이 그림을 두고 이렇게 적었다. "헤이그의 미술관에서 «델프트 풍경»을 본 순간부터,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보았다는 것을 알았다." 마우리츠하위스는 이 문장을 인용해, 오직 이 한 점만을 거는 전시 《베르메르와 단둘이》를 열기도 했다.
프루스트에게 이 그림은 단순한 애호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다섯 번째 권에서, 병든 작가 베르고트가 이 그림을 보러 갔다가 그 앞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져 죽게 만든다. 베르고트가 마지막으로 응시한 것은 그림 속 어느 담벼락의 작은 노란 얼룩, '프티 팡 드 뮈르 존(petit pan de mur jaune)'이었다. 그는 죽어가며 생각한다. 나도 저렇게 썼어야 했다고. 내 문장을 저 작은 노란 벽처럼, 그 자체로 값지게 만들었어야 했다고.
마우리츠하위스는 이 그림을 1822년 개관 이래 소장해왔다. 델프트라는 도시의 초상이지만, 실은 도시가 아니라 어느 한순간의 빛에 관한 그림이다. 베르메르는 화면을 세 개의 가로 띠로 나누었다. 물, 도시, 그리고 하늘. 아래쪽 강물에는 건물과 구름이 어른거리며 비치고, 도시의 절반은 아직 구름의 그늘에 잠겨 있는데 다른 절반에는 이미 햇빛이 닿아 있다.
한 천문학자는 이 그림 속 빛과 그림자를 연구해, 베르메르가 포착한 순간을 시각 단위까지 추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계산이 없어도 우리는 안다. 이것은 비가 막 그친 뒤의, 혹은 곧 무언가 시작되려는 아침의, 도시가 숨을 고르는 짧은 정적의 시간이라는 것을.
프루스트가 옳았는지 나는 모른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 같은 것이 정말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 그림 앞에서는, 델프트라는 낯선 도시의 삼백 년 전 어느 아침이, 마치 내가 오래전에 한 번 지나쳤던 곳처럼 조용히 되살아난다.
내 문장을 저 작은 노란 벽처럼, 그 자체로 값지게 만들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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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사실과 해석은 아래 전문가·기관의 공개 자료에 근거합니다. 자세한 해설은 각 원본에서 확인하세요.
- Dr. Beth Harris & Dr. Steven Zucker · Smarthistory (출처표기)
- 마우리츠하위스 공식 해설·복원 연구 · Mauritshuis, The Hague (출처표기)
-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공식 해설 · Rijksmuseum, Amsterdam (출처표기)
- 밑그림 발견 연구 (2022, 국립미술관·마우리츠하위스 공동) · Rijksmuseum / CODART (출처표기)
- 마우리츠하위스 공식 해설·전시 《Alone with Vermeer》 · Mauritshuis, The Hague (출처표기)
- 마르셀 프루스트 인용 (마우리츠하위스 해설 경유) · Mauritshuis, The Hague (출처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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