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가 그린 빛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 도망자로 산 세월이 완성한 세 장의 그림
이어지는 이야기 3편읽는 시간 약 11분

1606년 5월 29일, 로마의 캄포 마르치오에서 한 화가가 사람을 죽였다. 상대의 이름은 라누초 토마소니, 도박 빚을 둘러싼 시비였는지 여자를 둘러싼 질투였는지는 지금도 분명치 않다. 확실한 것은 그날 이후 그의 이름 위에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는 사실이다. 누구든 그를 알아보면 합법적으로 죽여도 좋다는 현상금까지 걸렸다. 화가는 로마를 떠나 나폴리로, 몰타로, 시칠리아로 도망쳤다. 도망치는 동안에도 그는 그림을 그렸다. 카라바조라는 이름은 그렇게 살인자와 화가라는 두 개의 신원을 동시에 지고 다녔다. 나는 그가 사람을 죽이기 전에 그린 그림 한 장, 죽이던 무렵에 그린 그림 한 장, 그리고 죽어가며 그린 마지막 그림 한 장을 차례로 찾아가 보기로 한다.
죽이기 전, 그는 빛을 들고 있었다
1602년, 로마의 귀족 치리아코 마테이가 카라바조에게 그림 한 점을 의뢰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유다가 입맞춤으로 예수를 배신하고 성전 경비병들이 그를 붙잡으러 다가서는 순간이다. 아일랜드 국립미술관은 이 장면을 "유다는 입맞춤으로 그리스도를 지목하고, 성전 경비병들은 그를 붙잡으러 다가선다"고 설명한다. 화면 왼쪽에서 몸을 뒤틀며 달아나는 인물은 사도 요한이고, 빛은 인공의 장치 없이 오직 달빛 하나에 의존한다. 미술관은 "오직 달빛만이 이 장면을 비춘다"고 적는다. 카라바조는 인물들을 화면 앞쪽 가까이 배치하고 강한 명암 대비를 사용해 극적인 순간을 만들어냈다.
화면 오른쪽 끝에는 등불을 든 남자가 있다. 아일랜드 국립미술관은 "그 남자의 얼굴에 카라바조는 서른한 살의 자신을 그려 넣었다, 사건을 지켜보는 관찰자로서"라고 설명한다. 그는 사건의 중심에 있지 않다. 붙잡는 사람도 붙잡히는 사람도 아니고, 그저 옆에서 빛을 들고 서 있을 뿐이다. 이 그림은 1802년 마테이 가문의 손을 떠났다. 1786년 조반니 바시가 이 작품을 카라바조의 네덜란드인 추종자 헤라르트 판 혼트호르스트의 것으로 잘못 기록했고, 그 이름표를 단 채 그림은 윌리엄 해밀턴 니스벳에게 팔려 스코틀랜드로 건너갔다. 위키피디아의 「The Taking of Christ (Caravaggio)」 항목은 "18세기 말 무렵 그림은 사라진 것으로 여겨졌고, 그 행방은 약 200년 동안 알려지지 않았다"고 기록한다.
1920년대, 아일랜드의 소아과 의사 마리 리 윌슨이 정체를 모른 채 이 그림을 사들였다. 남편 퍼시벌 리 윌슨 경위가 1920년 아일랜드공화군에 살해된 뒤 자신을 도와준 예수회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그녀는 1930년대 초 그림을 더블린 리슨 스트리트 예수회 공동체에 기증했다. 그림은 그 후 30년 가까이 혼트호르스트의 작품이라는 이름표를 단 채 식당 벽에 걸려 있었다. 1990년, 새 원장으로 부임한 노엘 바버 신부가 그림의 복원을 의뢰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예수회 아일랜드에 게재된 바버 신부의 회고에 따르면, "17세기 이탈리아 회화 전문가인 베네데티가 리슨 스트리트에서 이 그림을 보고, 적어도 유실된 카라바조의 훌륭한 버전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미술관 부원장 브라이언 케네디 박사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노엘, 앉으세요. 서서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지금 하려고 합니다." 로마의 대학원생 프란체스카 카펠레티와 라우라 테스타가 레카나티의 마테이 가문 문서고에서 원래 주문서를 찾아내면서 진위가 확정됐고, 재발견은 1993년 11월 공식 발표됐다. 바버 신부는 "예수회 공동체는 이 그림을 자선 신탁으로 보유하고 있었고, 임의로 처분할 권리가 없었다"고 설명한다. 그림은 1993년 아일랜드 국립미술관에 무기한 대여됐다. 지금도 미술관 라벨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더블린 리슨 스트리트 예수회 공동체로부터 아일랜드 국립미술관에 무기한 대여, 故 마리 리 윌슨 박사의 후한 마음에 감사하며, 1992."
노엘, 앉으세요. 서서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지금 하려고 합니다.
그림값을 받은 여름, 그는 칼을 들었다

1605년 6월 25일, 카라바조는 로마의 귀족 마시모 마시미와 계약서에 서명했다. 이전에 그려준 「가시관을 쓴 그리스도」와 같은 크기와 값으로 그림 한 점을 그려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완성작은 「이 사람을 보라」, 빌라도가 매질당하고 가시관을 쓴 예수를 군중 앞에 세우며 외친 말에서 제목을 땄다. 위키피디아의 「Ecce Homo (Caravaggio, Madrid)」 항목은 이 그림을 "그리스도는 피를 흘리며 가시관을 쓴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빌라도는 그의 앞에 서 있고, 다른 한 남자가 그리스도 뒤에서 붉은 옷을 들고 있다"고 묘사한다. 캔버스는 86×111센티미터, 계약서상 인도 기한은 그해 8월 초였다.
기한은 지켜지지 않았다. 1605년 7월 29일 밤, 피아자 나보나 부근에서 카라바조는 공증인 마리아노 파스콸로네를 칼로 내리쳐 머리에 심한 부상을 입혔다. 자신이 아끼던 모델이자 연인 레나를 둘러싼 말다툼 끝이었다. 위키피디아의 「Caravaggio」 항목은 "카라바조는 그의 모델이자 연인이었던 레나를 둘러싼 다툼 속에서 공증인 마리아노 파스콸로네 디 아쿠몰리에게 중상을 입힌 뒤 3주간 제노바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고 기록하며, 후원자들이 사건을 무마했다고도 적는다. 그림값을 받고 그림을 완성하지 못한 채, 그는 여름 한 철을 도망자로 보냈다. 매질당한 그리스도를 그리던 손이 실제로는 다른 사람에게 매질을 하고 있었다.
그림은 이후 스페인 왕실 소장품이 되어 펠리페 4세와 카를로스 2세의 처소를 거쳐 흘러 다니다가 어느 순간 다시 자취를 감췄다. 2021년 4월, 마드리드의 안소레나 경매장에 이 그림이 다시 나타났다. 추정가는 1,500유로, 호세 데 리베라 유파의 작품으로 소개되어 있었다. 프라도 미술관이 스페인 문화부에 이 사실을 알렸고 경매는 중단됐다. 로마 트레 대학의 마리아 크리스티나 테르차기와 볼로냐 미술아카데미의 마시모 풀리니가 그리스도의 해부학적 표현과 빛의 처리, 병사의 얼굴 등을 근거로 진작 가능성을 제기했다. 더 아트 뉴스페이퍼의 취재에서 테르차기는 이렇게 말한다. "재발견 이후 이 작품이 카라바조의 것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된 속도는 전례가 없을 정도로 빨랐다." 안드레아 치프리아니가 이끄는 복원팀과 원자력 공학자 클라우디오 팔쿠치의 정밀 진단을 거쳐, 그림은 2024년 5월 프라도에 걸렸다. 프라도의 보도자료는 소장 경위를 "2021년 4월 안소레나 경매장에 호세 데 리베라 문하생의 작품으로 소개되어 다시 나타났을 때, 프라도 미술관이 스페인 문화부에 이 작품의 중요성을 알렸다"고 기록한다. 소유자는 신원을 밝히지 않은 채 그림을 미술관에 대여했다.
매질당한 그리스도를 그리던 손이, 실제로는 다른 사람에게 매질을 하고 있었다.
칠월, 그는 배를 탔다

1610년 5월 11일 무렵, 제노바의 25세 귀족 마르칸토니오 도리아의 대리인은 나폴리에서 그림 한 점이 완성됐다고 보고했다. 의붓딸이 수녀원에 들어가 우르술라 수녀가 된 것을 기념하는 그림이었다. 성 우르술라는 4세기의 전설 속 인물로, 훈족 왕의 청혼을 거절했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갤러리 디탈리아 나폴리는 이 장면을 우르술라가 "화살이 그녀 순교의 도구임을 응시하는" 순간, "핏빛 망토와 대비되는 창백함"으로 설명한다. 화살이 가슴을 꿰뚫은 바로 다음 순간이 화면에 담겼다. 왼쪽에서 들어오는 한 줄기 빛이 다섯 인물을 어둠 속에서 끌어낸다.
인물들 중 하나, 우르술라의 뒤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얼굴이 있다. 갤러리 디탈리아는 이 인물을 "드라마를 지켜보는 이들 가운데 하나, 얼굴은 위로 향하고 입은 고뇌에 찬 표정으로 닫혀 있다"고 적으며, 이를 카라바조 자신의 초상으로 본다. 위키피디아의 「The Martyrdom of Saint Ursula (Caravaggio)」 항목도 "우르술라 뒤편의 위로 향한 얼굴은 카라바조 자신으로 보인다"고 기록한다. 그림은 완성되자마자 사고를 겪었다. 도리아의 대리인은 물감을 빨리 말리려 전날 그림을 볕에 내놓았다가 니스가 물러 표면이 상했다고 보고했고, 수리를 약속했다. 서둘러 마무리된 그림이었다.
두 달 뒤, 카라바조는 배에 올랐다. 위키피디아의 같은 항목은 이렇게 적는다. "7월, 그는 1606년 결투에서 한 젊은이를 죽인 죄에 대해 교황의 사면을 받기 위해 배를 타고 떠났다. 그러나 그를 기다린 것은 사면이 아니라 죽음이었다. 정확한 사인은 분명치 않으나 열병이 가장 자주 거론되며, 로마 북쪽 해안의 포르토 에르콜레에서였다." 「성 우르술라의 순교」는 그렇게 그의 마지막 완성작으로 남았다. 그림은 처음에는 마티아 프레티의 작품으로 잘못 알려졌다가 1980년에야 카라바조의 것으로 확정됐다. 지금은 나폴리의 갤러리 디탈리아, 인테사 산파올로 컬렉션에 걸려 있다. 화살에 꿰뚫리는 여자의 뒤에서 위를 올려다보던 그의 마지막 얼굴과 함께.
그러나 그를 기다린 것은 사면이 아니라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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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들려준 큐레이터
이 글의 사실과 해석은 아래 전문가·기관의 공개 자료에 근거합니다. 자세한 해설은 각 원본에서 확인하세요.
- 아일랜드 국립미술관 소장품 해설 (The Taking of Christ) · National Gallery of Ireland (출처표기)
- Fr. Noel Barber 회고 (「Rediscovering a Caravaggio Masterpiece」) · Jesuits Ireland (출처표기)
- 「The Taking of Christ (Caravaggio)」 항목 · Wikipedia (출처표기)
- 프라도 미술관 보도자료 (PR Newswire 게재) · Museo Nacional del Prado (출처표기)
- The Art Newspaper 취재 (Terzaghi·Pulini 인터뷰) · The Art Newspaper (출처표기)
- 「Ecce Homo (Caravaggio, Madrid)」 항목 · Wikipedia (출처표기)
- 갤러리 디탈리아 나폴리 소장품 해설 (Martyrdom of Saint Ursula) · Gallerie d'Italia – Napoli (출처표기)
- 「The Martyrdom of Saint Ursula (Caravaggio)」 항목 · Wikipedia (출처표기)
- 「Caravaggio」 항목 (1606년 살인·도피 기록) · Wikipedia (출처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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